GROUP  EXHIBITION

《Fading, Risingㅣ저물며 떠오르며》
윤혜진, 이산오


25th June

— 25th July, 2026

저무는 것과 떠오르는 것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사라지고, 하나는 온다. 그러나 해가 지는 자리에서 밤이 시작되고, 밤이 깊어지는 자리에서 새벽이 열린다. 끝은 언제나 다음의 시작을 품고 있고, 시작은 언제나 이전의 끝을 등에 지고 있다. 우리가 소멸이라고 부르는 것과 도래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오래전부터 한 몸처럼 포개진 채 흘러왔는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 《Fading, Rising | 저물며 떠오르며》는 그 포개진 시간 위에서 출발한다. 두 작가 모두 가까운 이를 떠나보낸 경험으로부터,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물음 앞에 자신의 작업을 세워왔다. 윤혜진의 화면 앞에 서면, 우리는 또렷하게 보는 대신 버텨내는 법을 익힌 눈과 마주하게 된다. 형상들은 선명해지기를 거부한 채 흐린 윤곽으로만 자신을 드러낸다. 색면과 덩어리가 겹겹이 쌓이며, 번지고 스며드는 레이어들이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어버린 듯한 색으로 떠오른다. 직면하기 어려운 고통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 시야가 흐릿해졌던 경험은 또렷한 풍경이 될 수 없는 풍경을 재현하게 하였다.


지난 개인전에서 작가는 반려동물의 오랜 투병과 조부의 상실을 작열하는 태양에 빗댔다. 희망의 상징으로 알려진 태양의 의미를 지우고, 태양이 지닌 압도적인 존재감 그 자체, 걷다가 벽을 마주한 것처럼, 눈앞이 흐려지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속절없음을 화면에 새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작열하는 태양의 시간이 지나갔다. 윤혜진은 이제 그 이후의 시간, 태양이 저문 뒤의 밤을 지나 다음 날 아침이 오기 직전의 새벽을 그린다. 새벽은 긍정도 부정도 딱 내리기 어려운 중립의 시간이다. 상실이라는 사건을 지나며 작가는 어떤 결과를 마주하기 직전의 그 긴장과 다짐을 새벽이라는 시간에서 느꼈고, 그것이 화면의 보랏빛 레이어가 되었다. <Night Scene 2>를 포함한 대부분의 작품에 자리하는 명확히 어떤 색이라 명명하기 어려운 중립의 색. 그 안에는 단번에 색을 내기보다 이런저런 것들이 축적되어 결국 이렇게 됐다는 감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보랏빛 시간의 한가운데에, 작가에게 새 생명이 찾아왔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집중해온 시간과 새 생명을 맞이하는 시간이 동시에 포개지는 지점에 서면서, 작가는 거대한 흐름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Fading, Rising | 저물며 떠오르며》의 화면들은 그 문턱 위에서, 실재와 부재 사이를 응시하는 눈이 길어 올린 흐릿하고도 단단한 풍경이다.


이산오 작가는 학부 시절부터 길가에 버려진 인형, 오래된 건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작은 꽃들에 시선을 주었다. 쓸모가 다했다고 여겨져 방치된 것들. 그것들에 대한 연민이 초기 작업의 바탕이었다. 그 후 조모의 임종을 지켜보며 그 연민은 훨씬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그 사색들을 메모하고 시로 적어내려가던 시간은 자연스럽게 현 작업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렇게 다뤄온 연필, 흙, 구리 등의 재료는 죽음을 다루는 감수성과 재료의 논리가 한 몸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생체 금속인 구리를 회화적 재료로 시도하여 신작을 선보인다. 구리는 생명체의 신진대사를 묵묵히 돕는 생체금속이면서도, 공기 중에 내버려두면 스스로 산화하고 색을 바꾸는 물질이다. 작가는 구리 가루를 캔버스에 올린 뒤 식초와 소금, 과산화수소를 더해 의도적으로 부식시키며 청록빛의 녹청을 피워낸다. 산화와 부식의 과정을 거쳐 갈아내고 다시 레이어를 올리는 이 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회화재료를 벗어나 생명의 순환과 소멸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생체 금속의 시간들이 화면에 새겨졌다.


신작 <못(pond)>위에는 꾀꼬리와 할미꽃이 등장한다. 처음부터 새를 그려야겠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조모를 잃은 후 쏟아내듯 그린 드로잉들을 나중에 돌이켜보니, 저도 모르게 날개와 새의 형상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었다. 신화 속 성령처럼, 이승과 저승을 잇는 전령처럼, 새는 작가가 부르기 전에 먼저 그림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작년 개인전을 마친 뒤 들른 묘원에서 마주한 한 마리의 꾀꼬리는 그 모든 것의 정점이었다. 화조도의 형식을 빌려 못 위에 자리한 꾀꼬리와 할미꽃은 남은 이를 위로하는 떠난 이의 환생이자 저물어간 이의 노래이다. 그렇게 녹청(patina)의 꾀꼬리는 ‘patina’의 문학적 뉘앙스가 지닌 그대로 누군가의 삶의 흔적과 켜켜이 쌓인 시간의 밀도를 재료적 의미를 통해서도 드러내고 있다. 녹청이라는 살아 있는 색 위에서 죽음을 끝맺음이 아닌 순환의 한 과정으로 삶을 기억하듯이 증언하는 것이다.


두 작가는 서로 다른 재료와 감각으로, 그러나 같은 확신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이산오는 금속이 스스로 변해가는 화학적 시간 안에서 소멸 이후에도 이어지는 순환을 포착하고, 윤혜진은 겹겹이 쌓인 색의 레이어 안에서 떠남과 도래가 동시에 일어나는 새벽의 빛을 피워낸다. 끝난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이어진다는 것. 포개진 시간의 한가운데에 조용히 서 있는 두 손의 기록은 끝없이 흘러가면서도 끝없이 살아내는 것들을 향한 찬사이자, 그 흐름 안에서 기어이 다음 장면을 맞이하는 모든 존재에게 건네는 조용한 위로이다.




GROUP EXHIBITION

저무는 것과 떠오르는 것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사라지고, 하나는 온다. 그러나 해가 지는 자

리에서 밤이 시작되고, 밤이 깊어지는 자리에서 새벽이 열린다. 끝은 언제나 다음의 시작을 품고 있고, 시작은 언제나 이전의 끝을 등에 지고 있다. 우리가 소멸이라고 부르는 것과 도래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오래전부터 한 몸처럼 포개진 채 흘러왔는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 《Fading, Rising | 저물며 떠오르며》는 그 포개진 시간 위에서 출발한다. 두 작가 모두 가까운 이를 떠나보낸 경험으로부터,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물음 앞에 자신의 작업을 세워왔다. 윤혜진의 화면 앞에 서면, 우리는 또렷하게 보는 대신 버텨내는 법을 익힌 눈과 마주하게 된다. 형상들은 선명해지기를 거부한 채 흐린 윤곽으로만 자신을 드러낸다. 색면과 덩어리가 겹겹이 쌓이며, 번지고 스며드는 레이어들이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어버린 듯한 색으로 떠오른다. 직면하기 어려운 고통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 시야가 흐릿해졌던 경험은 또렷한 풍경이 될 수 없는 풍경을 재현하게 하였다.


지난 개인전에서 작가는 반려동물의 오랜 투병과 조부의 상실을 작열하는 태양에 빗댔다. 희망의 상징으로 알려진 태양의 의미를 지우고, 태양이 지닌 압도적인 존재감 그 자체, 걷다가 벽을 마주한 것처럼, 눈앞이 흐려지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속절없음을 화면에 새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작열하는 태양의 시간이 지나갔다. 윤혜진은 이제 그 이후의 시간, 태양이 저문 뒤의 밤을 지나 다음 날 아침이 오기 직전의 새벽을 그린다. 새벽은 긍정도 부정도 딱 내리기 어려운 중립의 시간이다. 상실이라는 사건을 지나며 작가는 어떤 결과를 마주하기 직전의 그

긴장과 다짐을 새벽이라는 시간에서 느꼈고, 그것이 화면의 보랏빛 레이어가 되었다.


<Night Scene 2>를 포함한 대부분의 작품에 자리하는 명확히 어떤 색이라 명명하기 어려운 중립의 색. 그 안에는 단번에 색을 내기보다 이런저런 것들이 축적되어 결국 이렇게 됐다는 감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보랏빛 시간의 한가운데에, 작가에게 새 생명이 찾아왔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집중해온 시간과 새 생명을 맞이하는 시간이 동시에 포개지는 지점에 서면서, 작가는 거대한 흐름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Fading, Rising | 저물며 떠오르며》의 화면들은 그 문턱 위에서, 실재와 부재 사이를 응시하는 눈이 길어 올린 흐릿하고도 단단한 풍경이다.


이산오 작가는 학부 시절부터 길가에 버려진 인형, 오래된 건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작은 꽃들에 시선을 주었다. 쓸모가 다했다고 여겨져 방치된 것들. 그것들에 대한 연민이 초기 작업의 바탕이었다. 그 후 조모의 임종을 지켜보며 그 연민은 훨씬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그 사색들을 메모하고 시로 적어내려가던 시간은 자연스럽게 현 작업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렇게 다뤄온 연필, 흙, 구리 등의 재료는 죽음을 다루는 감수성과 재료의 논리가 한 몸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생체 금속인 구리를 회화적 재료로 시도하여 신작을 선보인다. 구리는 생명체의 신진대사를 묵묵히 돕는 생체금속이면서도, 공기 중에 내버려두면 스스로 산화하고 색을 바꾸는 물질이다. 작가는 구리 가루를 캔버스에 올린 뒤 식초와 소금, 과산화수소를 더해 의도적으로 부식시키며 청록빛의 녹청을 피워낸다. 산화와 부식의 과정을 거쳐 갈아내고 다시 레이어를 올리는 이 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회화재료를 벗어나 생명의 순환과 소멸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생체 금속의 시간들이 화면에 새겨졌다.


신작 <못(pond)>위에는 꾀꼬리와 할미꽃이 등장한다. 처음부터 새를 그려야겠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조모를 잃은 후 쏟아내듯 그린 드로잉들을 나중에 돌이켜보니, 저도 모르게 날개와 새의 형상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었다. 신화 속 성령처럼, 이승과 저승을 잇는 전령처럼, 새는 작가가 부르기 전에 먼저 그림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작년 개인전을 마친 뒤 들른 묘원에서 마주한 한 마리의 꾀꼬리는 그 모든 것의 정점이었다. 화조도의 형식을 빌려 못 위에 자리한 꾀꼬리와 할미꽃은 남은 이를 위로하는 떠난 이의 환생이자 저물어간 이의 노래이다. 그렇게 녹청(patina)의 꾀꼬리는 ‘patina’의 문학적 뉘앙스가 지닌 그대로 누군가의 삶의 흔적과 켜켜이 쌓인 시간의 밀도를 재료적 의미를 통해서도 드러내고 있다. 녹청이라는 살아 있는 색 위에서 죽음을 끝맺음이 아닌 순환의 한 과정으로 삶을 기억하듯이 증언하는 것이다.


두 작가는 서로 다른 재료와 감각으로, 그러나 같은 확신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이산오는 금속이 스스로 변해가는 화학적 시간 안에서 소멸 이후에도 이어지는 순환을 포착하고, 윤혜진은 겹겹이 쌓인 색의 레이어 안에서 떠남과 도래가 동시에 일어나는 새벽의 빛을 피워낸다. 끝난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이어진다는 것. 포개진 시간의 한가운데에 조용히 서 있는 두 손의 기록은 끝없이 흘러가면서도 끝없이 살아내는 것들을 향한 찬사이자, 그 흐름 안에서 기어이 다음 장면을 맞이하는 모든 존재에게 건네는 조용한 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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