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시간을 시계의 바늘, 달력의 격자, 혹은 기억의 단편적 파편으로 측정한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계량 가능한 수치의 얼굴만을 하고 있지 않다. 미지의 시간을 거쳐 오랜 손길에 매끈히 닳아 윤을 드러낸 나무의 결, 비선형적인 시간의 공존이 유려히 굳혀진 흙의 형상, 광물에서 미물이 되는 동안 방황의 흔적처럼 남은 모래 입자의 기복이 느리게 축적된 표면들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의 발화를 시도한다.
아프리칸 아트의 오드플랫, 도예 고유연 작가, 회화 박예림 작가의 그룹전 《Where Material Remembers》는 바로 그 물질적 발화에 귀 기울이는 자리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겹겹이 퇴적되고, 심층에 스며들며, 표면 위에서 발화한다.
시간의 결을 담은 빈티지 가구와 사물을 소개하는 오드플랫(Oddflat)의 아프리칸 아트 오브제와 스툴은 19세기를 훌쩍 넘어, 미지의 시간 속에서 사용되어 온 기물들이다. 한 그루의 목재에서 태어난 일체 조형물은 세누포(Senufo), 헤헤(Hehe), 누페(Nupe) 등 다양한 민족 공동체의 삶과 더불어 여러 세대를 건너오며, 일상과 의례, 노동과 휴식, 영성과 같은 역사가 ‘쓰임’ 속에 발현된 예술품으로 남아 있다.
동물의 형태를 닮은 헤드레스트(headrest)는 단순한 머리받침대가 아니라, 머리카락이나 장식을 보호하고 주인의 몸과 꿈, 위신과 연결되는 영적인 성격의 기물로 기능했다. 세누포, 누페와 같은 스툴은 일상적인 자리에 놓이기도 하고 의례의 중심에 놓이기도 하면서, 아프리카 여성들의 일상적 공간인 시장과 노동의 기억을 담고 있다. 정확히 가늠하기도 어려울 만큼의 기나긴 시간의 흔적과 기억의 조각이 한 그루의 통나무 물질 그 자체에서 발현된다. 이는 과거의 한 순간을 전시장에 박제하는 것이 아닌 21세기 현대인의 삶까지 가까이 다가온 아프리칸 아트의 현재적 고고학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기물들의 표면에는 눕기, 앉고 일어서기, 담기와 비우기 같은 반복된 행위들이 남긴 물리적 변화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쓰임으로 인해 닳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쓰임 덕분에 더 선명한 기억의 형태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공동체의 몸짓이 켜켜이 새겨진 살아 있는 기록물이며, 오늘 이곳에 서는 시간의 압축된 기념비로서 공예품의 쓰임과 닳음, 반복과 순환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흙은 또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증언한다. 이번 전시에 함께하는 고유연의 신작 <Reminiscence Series>는 시간의 비선형성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된다. 본래 선형적 시간은 ‘이미 지나간 것–현재–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나뉘며, 이 순서가 결코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전제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늘어나기도 하고, 행복한 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스쳐 지나가며, 과거와 현재가 겹쳐 흐르는 듯한 경험은 그의 손끝에서 흙의 층위로 전환된다. 코일링(coiling) 기법으로 길게 민 흙가래를 한 줄씩 쌓아 올리는 과정은 곧 시간과 기억이 겹겹이 쌓이는 구조와 닮아 있다. 유기적인 곡선의 형태와 구멍이 나 있는 형태의 작업을 전개할 때 또 다른 흙 *Bridge(다리)를 덧붙여 물렁하고 유연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의 <Reminiscence Series>는 그렇게 흙과 불의 물질성 속에서 시간의 층위와 비정형적 기억을 발화한다.
*Bridge는 작가가 본인의 작업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단어임과 동시에 ‘과거와 현재, 미래는 서로 통하며 이어진다’라는 작업 세계관과도 상통하는 부분이다.
벽면에 펼쳐진 종이의 화면에서는 또 다른 언어가 들린다. 박예림은 한지, 먹, 모래라는 전통적이고 자연적인 재료를 통해 물질과 형상을 넘나드는 회화를 제시한다. 그는 유리판 위에 그은 획을 종이에 판화처럼 찍어내고, 표면 위에 모래를 뿌려 털어내는 과정을 반복하는 작업을 전개한다. 모래층은 다시 먹의 획을 받아내며, 화면은 끊임없이 가려지고 드러나기를 되풀이한다. 작가에게 ‘획’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신체적 수행의 기록이며, 동시에 산의 능선, 바람의 흐름, 파도의 물결처럼 대자연의 리듬을 상징하고 있다. 이때 모래는 ‘획’에 입체성과 저항을 부여해, 감상자가 촉각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매개로 작용한다. <Wavy Road>, <Wave drawing series>, <바람 표지판>의 작품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작가는 먹과 모래가 화면 위에서 역동적으로 흘러넘치듯 번지고 쌓이는 장면을 통해 그의 작업이 지향하는 회화적 확장성을 단번에 드러낸다. 모래와 먹은 한지 위에서 비정형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을 통해 오랜 시간을 담은 물질 자체의 시간성과 시작도 끝도 명확히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영원성을 지속적으로 사유하게 한다. 그만의 독창적인 작업 방식과 작업물은 시각적 경험을 넘어, 시간이 퇴적되고 흔적으로 응결되는 과정을 날것으로 발화하는 풍경이다.
《Where Material Remembers》는 시간을 재는 기술이 아니라, 시간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기술에 관한 전시이다. 물질은 그 자체로 오래된 언어를 품고 있으며, 우리는 그 물질이 시각예술의 문법 속에서 환원된 언어를 따라 시간의 정령(精靈, Spirit)을 느낄 수 있다. 조용하고 우아하지만 압도적인 이 발화 속에서,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로 다가오는 물질인 나무와 흙, 모래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