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O EXHIBITION

JANG GEONYUL

<<사라지는 것들의 초상>>

24th July

— 23th Aug 2025




 

사라지는 것은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된 것들이다.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 홀연 사라짐으로써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싶은 마음.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알아차림을 요청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늘 그곳에 있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것들. 변하지 않았다면 간과되고 말았을 무엇. 장건율 작가는 부동성에 머무르길 중단하고,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어떤 존재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알아챈다. 


변화하는 시간 속 모양을 달리하는 구름 속에서. 탄생, 생장, 쇠락의 순간을 연이어 보여주는 아이리스 꽃잎 사이로. 그리고 순환하는 계절을 매해 다르게 맞이하는 나뭇가지 틈새에서. 그는 다만 말없이 사라질 뿐인 존재들, 혹은 자신의 사라짐 속에서만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었던 어느 삶들의 초상을 남겨둔다.  초상을 그린다는 것은 관찰과 응시의 시간을 내포하며, 묘사하고 있는 대상 스스로조차 깨닫지 못한 세부를 대신해 포착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작가가 말했듯, 그것은 단지 대상을 닮게 그리는 기술이 아니라, 내 앞에 분명하게 존재했던 대상의 실재 흔적을 세밀하게 기억하는 형식인 것이다. 이에 따라 <사라지는 것들의 초상>은 자신의 살아 있음을 증명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펼쳐내는 존재들, 말하자면 눈길과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표정들, 그들의 순간적 진실을 지극하게 응시한,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있는 한 존재의 시선으로 독해될 수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을 수 없듯, 머무르는 구름, 지지 않는 꽃과, 그때 그 나무를 우리는 두 번 마주할 수 없다. 작가의 작품 속 사라지고 있는 사물들과 찰나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간, 그리고 그곳에 그들과 함께했던 작가뿐이다. 그때의 작가마저도 계속하여 변화하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채, 한시적인 그 인연은 자꾸만 맺어졌다 풀어진다.


저 구름을 보던 나는 누구였으며, 이 구름 아래 서 있는 나는 여전히 동일한 존재일까? 변하는 하늘이나 시드는 꽃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자기동일 적인 것은 없다. 살아 있고 살아 있기 때문에 끝없이 변한다는 것. 동일한 순간은 두 번 나타나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들의 초상>이란 결국 사라지는 존재에 관한 초상이면서도 사라지는 존재에 의한 초상이다.

 

마치 페소아의 시처럼, 사라지는 것들의 초상을 남기는 작가의 손짓은 언제나 잘가라는 말 대신 아직 볼 수 있어서 좋다는 마음을 전달한다.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잠시나마 붙잡고 싶은 마음. 그것은 글을 쓰는 일, 사진을 남기는 일, 그리고 초상을 그리는 일의 공통된 기저다. 이미 흐트러지고 있는 어떤 것의 윤곽을 붙잡는 모든 행위는,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마는 우리의 만남에 관한 한발 느린 추도를 기록한다.


이처럼 모든 것이 두 번 반복되지 않는 세계와 이토록 불안정한 현재 속에서, 우리는 한시적으로만 함께 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만남과 조우, 그리고 시선의 공유는 더없이 아름다워진다. 그 대상이 자연과 사람의 교차일지라도 그러하다.

 

우리가 살아있음을 얘기하기 위해 응시하는 것. 그 빛을 눈에 흘려 넣는 것. 그 빛을 종이 위에 다시 흘려내는 것이 그림 그리기라면, 그 결과물이 그림이라면, 그걸 잘하고 싶다. 대상이 꽃이건 나무건 사람이건 간에 말이다. 초상화를 그리는 마음으로.

 

작가의 말에 따라 존재의 확언적 증표란 다름 아닌 응시다. 모든 사물은 빛으로서 우리의 시선에 닿으며, 우리 역시 하나의 빛으로서 그들과 존재를 교환한다. 사람의 응시가 눈동자에 비춘 서로의 객관적 실존을 확인하는 일이라면, 자연의 응시는 때때로 계시처럼 주어져서는 그 안에 머무르는 자의 주관적 실존을 자발적으로 발견하는 일을 가능케 한다. 이렇듯 만물은 서로를 모종의 방식으로 응시하고 인식하며, 모든 지각은 하나의 각인이자 기억이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기억함으로써 그것을 비로소 알아차리는 일 역시 가능할까? 어떠한 대상을 그린다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과정, 즉 무한한 변화로 생동하는 대상의 일면이 나에게 와닿는 순간의 감각을 충실히 기억하면서, 그 대상의 본연과 그를 바라보았던 나의 시선을 동시에 알아차리는 일을 뜻할 것이다. 따라서 <사라지는 것들의 초상>은 다시 한번 의미의 외연을 확장하게 된다. 그것은 언제나 이중의 초상, 다시 말해 당신을 그림으로써 당신과 나를 동시에 발견하는 일의 경이를 간직한다.


이렇듯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된 존재들 - 구름, 꽃, 그리고 나무는 현실의 어느 순간 우리를 잠시 동안만 스치면서 스스로의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남겨진 것이 다만 우리가 조우했다는 기억, 찰나의 관계, 빛과 시선의 교환뿐일지라도. 그리고 아쉬움을 메우려는 화면, 이미지, 장면, 색이 물든 종이, 빛이 깃든 캔버스, 그리고 끝없이 그때를 추억하는 지금. 지금. 지금. 그뿐일지라도.

 

그러므로 아름다울 수 있었다고.

유한한 존재들의 만남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그것으로 괜찮다고 일러주며, 위로하며.

 

사라지는 것들은 끊임없이 물러난 채 끝도 없이 머무른다



SOLO EXHIBITION

사라지는 것은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된 것들이다.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 홀연 사라짐으로써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싶은 마음.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알아차림을 요청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늘 그곳에 있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것들. 변하지 않았다면 간과되고 말았을 무엇. 장건율 작가는 부동성에 머무르길 중단하고,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어떤 존재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알아챈다.


변화하는 시간 속 모양을 달리하는 구름 속에서. 탄생, 생장, 쇠락의 순간을 연이어 보여주는 아이리스 꽃잎 사이로. 그리고 순환하는 계절을 매해 다르게 맞이하는 나뭇가지 틈새에서. 그는 다만 말없이 사라질 뿐인 존재들, 혹은 자신의 사라짐 속에서만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었던 어느 삶들의 초상을 남겨둔다.


초상을 그린다는 것은 관찰과 응시의 시간을 내포하며, 묘사하고 있는 대상 스스로조차 깨닫지 못한 세부를 대신해 포착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작가가 말했듯, 그것은 단지 대상을 닮게 그리는 기술이 아니라, 내 앞에 분명하게 존재했던 대상의 실재 흔적을 세밀하게 기억하는 형식인 것이다. 이에 따라 <사라지는 것들의 초상>은 자신의 살아 있음을 증명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펼쳐내는 존재들, 말하자면 눈길과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표정들, 그들의 순간적 진실을 지극하게 응시한,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있는 한 존재의 시선으로 독해될 수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을 수 없듯, 머무르는 구름, 지지 않는 꽃과, 그때 그 나무를 우리는 두 번 마주할 수 없다. 작가의 작품 속 사라지고 있는 사물들과 찰나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간, 그리고 그곳에 그들과 함께했던 작가뿐이다. 그때의 작가마저도 계속하여 변화하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채, 한시적인 그 인연은 자꾸만 맺어졌다 풀어진다. 저 구름을 보던 나는 누구였으며, 이 구름 아래 서 있는 나는 여전히 동일한 존재일까? 변하는 하늘이나 시드는 꽃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자기동일 적인 것은 없다. 살아 있고 살아 있기 때문에 끝없이 변한다는 것. 동일한 순간은 두 번 나타나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들의 초상>이란 결국 사라지는 존재에 관한 초상이면서도 사라지는 존재에 의한 초상이다.

 

마치 페소아의 시처럼, 사라지는 것들의 초상을 남기는 작가의 손짓은 언제나 잘가라는 말 대신 아직 볼 수 있어서 좋다는 마음을 전달한다.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잠시나마 붙잡고 싶은 마음. 그것은 글을 쓰는 일, 사진을 남기는 일, 그리고 초상을 그리는 일의 공통된 기저다. 이미 흐트러지고 있는 어떤 것의 윤곽을 붙잡는 모든 행위는,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마는 우리의 만남에 관한 한발 느린 추도를 기록한다.


이처럼 모든 것이 두 번 반복되지 않는 세계와 이토록 불안정한 현재 속에서, 우리는 한시적으로만 함께 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만남과 조우, 그리고 시선의 공유는 더없이 아름다워진다. 그 대상이 자연과 사람의 교차일지라도 그러하다.

 

우리가 살아있음을 얘기하기 위해 응시하는 것. 그 빛을 눈에 흘려 넣는 것. 그 빛을 종이 위에 다시 흘려내는 것이 그림 그리기라면, 그 결과물이 그림이라면, 그걸 잘하고 싶다. 대상이 꽃이건 나무건 사람이건 간에 말이다. 초상화를 그리는 마음으로.

 

작가의 말에 따라 존재의 확언적 증표란 다름 아닌 응시다. 모든 사물은 빛으로서 우리의 시선에 닿으며, 우리 역시 하나의 빛으로서 그들과 존재를 교환한다. 사람의 응시가 눈동자에 비춘 서로의 객관적 실존을 확인하는 일이라면, 자연의 응시는 때때로 계시처럼 주어져서는 그 안에 머무르는 자의 주관적 실존을 자발적으로 발견하는 일을 가능케 한다. 이렇듯 만물은 서로를 모종의 방식으로 응시하고 인식하며, 모든 지각은 하나의 각인이자 기억이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기억함으로써 그것을 비로소 알아차리는 일 역시 가능할까? 어떠한 대상을 그린다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과정, 즉 무한한 변화로 생동하는 대상의 일면이 나에게 와닿는 순간의 감각을 충실히 기억하면서, 그 대상의 본연과 그를 바라보았던 나의 시선을 동시에 알아차리는 일을 뜻할 것이다. 따라서 <사라지는 것들의 초상>은 다시 한번 의미의 외연을 확장하게 된다. 그것은 언제나 이중의 초상, 다시 말해 당신을 그림으로써 당신과 나를 동시에 발견하는 일의 경이를 간직한다.


이렇듯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된 존재들 - 구름, 꽃, 그리고 나무는 현실의 어느 순간 우리를 잠시 동안만 스치면서 스스로의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남겨진 것이 다만 우리가 조우했다는 기억, 찰나의 관계, 빛과 시선의 교환뿐일지라도. 그리고 아쉬움을 메우려는 화면, 이미지, 장면, 색이 물든 종이, 빛이 깃든 캔버스, 그리고 끝없이 그때를 추억하는 지금. 지금. 지금. 그뿐일지라도.

 

그러므로 아름다울 수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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